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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
작성일23-10-20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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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만삭이 된 혜주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먹덧 때문에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늘어 통통해지는 바람에 가끔 우울하긴 했지만 대체로 평온한 일상이었다.
요새 그녀의 취미는 아기방을 꾸미는 것이었다. 필연 내외가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를 보내는 덕에 40평이나 되는 아기방이 벌써 복작대는 느낌이었다.
어디 그뿐이게?
손주가 생겼다는 것에 기쁨의 눈물을 흘린 수철 내외 역시 틈만 나면 선물을 안겨 왔다.
아기 옷장에 착착 걸린 배냇저고리와 손수건은 미옥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가게 보느라 잘 시간도 부족할 텐데 뭘 이런 것까지 준비하냐고 했더니 원래 첫 손주 배냇저고리는 친정엄마가 해주는 법이란다.
그런 법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주고 싶은 그 마음이 고마워서 혜주는 기쁘게 선물을 받았다.
필립에게는 노래를 선물 받았다.
[장어의 꿈]이라는 싱잉랩인데 선우연이 꿨다는 태몽에 영감을 받아 하루 만에 써 내려간 곡이란다.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아주 어렸을 적 버드나무 잎을 닮은 아주 작은 물고기
깜깜한 어둠 속 하늘하늘 흔들리며 투명한 꿈을 꾸었지
따뜻하고 싶어 나아가고 싶어 목적지는 없어 그저 나가고만 싶어
댐잇, 여기가 아니잖아. 댐잇,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목적지는 없어 그저 나아가는 나는 댓잎뱀장어, 댓잎, 댓잎, 댓잎 뱀장어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실타래에서 떨어져나온 은실 한 가닥
일렁이는 물결 속 옅은 빛이 감싼 세상 하늘하늘 흔들리며 하늘빛 꿈을 꾸었지
사랑받고 싶어 품에 폭 안기고 싶어 목적지는 없어 그저 꿈을 꾸고 싶어
댐잇, 여기가 아니잖아. 댐잇,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목적지는 없어 그저 나아가는 나는 댓잎뱀장어, 댓잎, 댓잎, 댓잎 뱀장어]
지금도 스피커에선 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스트리밍이 아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였다.
“이 노래 진짜 웃기지 않아요? 이게 뜰 줄 누가 알았겠어.”
배냇저고리를 정리하며 혜주가 쿡쿡거렸다.
옆에서 택배 상자를 뜯고 있던 주원이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왜, 결과물 나온 거 보고 난 뜰 줄 알았는데.”
“……뜰 줄 알았다고요?”
이런 막귀를 보았나!
혜주는 기함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은 노래도 아니고 랩도 아닌 요상한 읊조림이었다. 요새 유행하는 싱잉랩이라곤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는 폼이 영 이상해 내 아기 태몽으로 뭔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며 타박도 했다.
망랩으로 반짝 뜬 후 소속사가 생긴 필립이 조만간 디지털 싱글 앨범을 낸다고 했을 때도 설마 이 곡이 통과할 줄은 몰랐다.
한데 놀랍게도 장어의 꿈은 아이돌이 독주하는 앨범 판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원제인 장어의 꿈보다 댐잇댓잎송이라고 더 알려진 이 곡은 댐잇깻잎송, 댐잇닷닢송 등으로 파생하며 또다시 밈을 만들어냈다.
이쯤 되니 내가 막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춘택이가 잘 돼서 다행이긴 해요.”
“우리 황금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조카 노릇 톡톡히 하는 거지. 황금이 태몽으로 만든 노래니까 저작권료 반띵하자고 해야겠어.”
“진짜 그래 볼까?”
“오춘택 삥 뜯어서 까까 사주자.”
“콜.”
주원과 혜주가 부부사기단처럼 눈을 맞추고 웃었다.
배 속 아들의 태명은 ‘황금이’였다.
처음 주원이 지어온 건 무식하게도 ‘짱어’였는데, 그놈의 태몽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아기가 처음 쓰는 이름을 짱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혜주가 항의하자 겨우 한발 양보한 게 ‘황금이’였다.
황금 항아리에 들어 있던 황금 장어. 눈동자도 황금색이라 했으니 어떻게 따져봐도 ‘황금이’가 나았다.
“황금이는 좋겠네. 춘택이 삥까지 뜯으면 태어나자마자 엄마보다 재산이 많겠어요.”
“넌 강주원 가졌잖아.”
“강주원이 얼만데요.”
“값으로 매길 수 없어. 강주원 가지면 다 가진 거야.”
“치…… 값으로 매길 수 없으면 가치가 없는 거네. 어디에 팔 수도 없으니까.”
“와, 내 가치를 여기서 증명하게 하네.”
주원이 혜주를 덥석 안아 침실로 데려갔다.
이 남자가 대체 뭘 하려고 이러나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훌렁 웃통을 벗었다.
“?”
난데없는 변강쇠 코스프레에 혜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해요?”
“똑바로 누워 봐. 마사지해 줄게.”
아, 이건 안 넘어갈 수가 없는데.
행여 대낮부터 뜨밤 보내자고 들이대는 거면 엉덩이를 차 주려고 했던 혜주가 순순히 두 손을 포개고 누웠다.
나긋나긋한 손길이 종아리를 주물렀다. 임신 중기가 지난 무렵부터 수시로 몸이 붓기 시작한 혜주를 위해 매일같이 마사지를 해 주다 보니 어느새 전문가 못지않은 스킬을 갖춘 그다.
혜주는 하루 중 이 시간이 제일 좋았다.
“오혜주를 세상에서 제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게 누구야.”
“아…… 진짜 시원하다. 오빠요.”
“나 없으면 이런 마사지 받을 수 있어, 없어.”
“당연히 없죠. 오빠 손길이 최고야.”
노동력을 바치고 제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주원의 전략은 확실히 통했다.
여느 마사지숍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그의 손길에 혜주는 어느새 눈이 가물가물해졌다.
“나 배 많이 나온 거 안 이상해요? 아래쪽에 살짝 튼살도 생긴 거 같아. 그렇게 자세히 보면 좀 부끄러워요.”
배를 마사지하기 시작한 주원에게 혜주가 말했다.
“뭐래. 이렇게 예쁜 훈장을 동네방네 자랑 못 해서 아쉽기만 한데.”
“푸흡, 자랑하는 거 좋아하는 건 알지만 와이프 튼살까지 자랑하게요?”
“예쁜 건 일단 자랑하고 봐야 해.”
“못 말려, 진짜.”
주원은 원을 그리며 혜주의 배를 마사지하다가 가만히 입술을 댔다.
“황금아, 듣고 있냐.”
손길만큼 다정한 목소리가 배꼽을 통해 전해졌다.
“엄마 그만 힘들게 하고 얼른 방 빼자. 나오면 아빠가 자전거 가르쳐 줄게.”
그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배꼽이 간질거렸다. 옅게 불어온 숨이, 다정하게 살갗을 울리는 파동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신생아한테 자전거 가르칠 생각부터 하는 거예요?”
“나 닮았으면 운동신경 하나는 특출날걸.”
“……다른 건 다 오빠 닮아도 성격은 나 닮으면 좋겠다.”
“악담이 지나치네.”
“내 성격이 왜요. 어디가 어때서?”
“솔직히 좀.”
“좀, 뭐요?”
잔소리도 많고, 잔정도 많고, 험한 세상 살아가기엔 걱정이 많이 되는 게 사실이긴 하지.
“아무튼 난 성격 보고 결혼 안 했어. 얼굴 보고 했지.”
“…….”
이거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가 좋아야 하는 건가.
잠시 헷갈린 혜주는 그냥 싱겁게 웃으며 주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몰라. 누굴 닮든 평타는 치겠죠, 뭐.”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몰랐다.
얼마 후, 어느 방면으로 봐도 월등한 슈퍼베이비를 만나게 될 거라곤.
*
“응애! 응애!”
황금이는 열 달을 꽉 채우고 태어났다.
무려 4.52 킬로그램의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올해 태어난 아기 중 제일 크다며 깜짝 놀란 의료진이 두 번이나 체중을 다시 재볼 정도였다.
“산모님이 임신 중에 잘 드셨나 봐요. 무척 건강한 아기네요. 보세요, 머리카락도 다 나 있어요!”
말마따나 황금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완성형이었다.
우람한 뼈대는 물론이거니와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카락 때문에 태어난 지 한 달은 된 것처럼 보였다. 콧대는 또 얼마나 높은지. 신생아 콧날이 이렇게 오똑할 수가 없다며 모두가 신기해했다.
누가 봐도 주원을 꼭 닮은 잘생긴 아기였다.
“혜주야, 고생했어. 정말 애썼어, 여보.”
결혼 후 눈물이 많아진 주원은 혜주가 진통하는 내내 울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겠다.
초음파로 봤을 때보다 훨씬 큰 불효자 녀석 때문에 결국엔 제왕절개로 낳아야 했기에 막판에 급히 수술실로 들어가야 했는데, 수술 침대에 실려 사라지는 혜주의 모습을 보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다.
“많이 아팠지.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다. 가슴 아파서 미치겠다, 진짜.”
수술 부위의 통증 때문에 파리한 안색의 혜주를 보고 결국 그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오빠 우는 거 사진으로 남겨놔야 하는데.”
“이 와중에 그런 말이 나와?”
“오빠는 울 때가 제일 귀여우니까.”
농담을 던지는 혜주를 보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은 그였다.
*
황금이가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조리원을 거의 문지방처럼 드나드는 양가 부모님이 한 차례씩 다녀간 후 혜주는 오후 늦게서야 잠에서 깼다. 몸조리를 해야 하는 혜주를 깨우지 않기 위해 신생아실에서 황금이만 보고 갔다고 했다.
“황금이 보고 뭐래요? 너무 예쁘다고 하시죠?”
“말해 뭐해. 부모님 눈이 거의 하트 모양이 됐어. 아버님, 어머님도 마찬가지고.”
주원이 혜주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다.
마침 목이 말랐던 혜주가 군말 없이 한 컵을 비웠다.
“나도 황금이 보고 싶다. 지금 잠들었을까요?”
“글쎄. 10분 전까진 자고 있었는데.”
“가볼래요.”
“걷지 마. 아직 무리야.”
“걸을 수 있다니까요.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서 그런가 회복이 무척 빨라요.”
“그래도.”
컨디션 돌아온 지가 언젠데 주원은 아직도 그녀를 항아리 취급했다.
건드리면 깨질까 손도 못 대는 그를 혜주가 핀잔했다.
“다른 산모들도 다 걷는다고요. 너무 안 걸으면 오히려 회복이 더디대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주원도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내 팔 꽉 붙잡고 가.”
주원이 팔을 내밀었다. 혜주는 한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팔에 의지해 몇 걸음 걸으니 어느새 신생아실 앞이었다.
황금이는 속싸개에 싸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돌돌 이불에 말려 있는 몸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제일 귀여운 포인트는 얼굴과 어깨의 너비가 똑같다는 거였다. 머리가 큰 건지, 어깨가 좁은 건지, 아마도 둘 다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작을 수가 있죠? 너무 신기해요.”
혜주는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귀여운 녀석을 내가 낳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와 내가 열렬히 사랑한 증거였으며, 그와 내가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증표였다.
“어? 황금이 웃는데?”
때마침 황금이가 한쪽 입꼬리를 꼼지락거렸다.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니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다.
“우리 아들 어쩌냐. 벌써 웃는 게 좀 건방지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거 꼭 누구 닮았다.”
혜주가 킥킥대며 주원의 손을 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내 남자의 손.
아무 말 없이 잡아도 언제나 다정하게 깍지를 껴 주는 자상한 손이다.
“사랑해요, 오빠.”
너른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혜주가 속삭였다.
주원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훨씬 스타베팅사랑해, 혜주야.”
엄마와 아빠의 달콤한 속삭임이 들리는지 황금이가 다시 웃었다.
이번엔 양쪽 입꼬리가 다 올라간 완벽한 미소였다.
통통한 뺨에 살짝 팬 볼우물에 주원과 혜주는 심장 폭격을 당했다.
황금이와 함께 만들어갈 앞날을 상상하니 두근두근 설레기만 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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